'고려의 황도 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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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089회 작성일 02-03-1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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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이 우뚝우뚝…즐비한 상점



'고려의 황도 개경'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서울에서 불과 60㎞. 한반도 중심부에 자리한 고려의 500년 도읍지 개성.



고려 시대의 명칭으로는 개경(開京)인 이곳은 당시 ‘천자의 나라’를 자처한 고려인들의 자부심의 상징으로 황도, 황성으로 불렸다.



‘고려의 황도 개경’은 한국역사연구회개경 연구반의 젊은 학자들이 1996년 이후 5년여 개경의 역사를 종합적ㆍ체계적으로 연구한 결실이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고려의 수도로서의 개경의 구조를 풍수, 성곽, 궁궐과 관청, 태묘와 사직, 절, 행정구역 등으로 나눠 세밀하게 고찰했다.



2부는 당시 개경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에 관한 이야기다. 시장과 주거, 조세, 교육,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축제를 다룬다.



“그 나라를 무마하기 위해 그 지경에 들어서면 성곽들이 우뚝우뚝하여 실로 쉽사리 업신여길 수 없다.”



송나라 사진 서긍(徐兢)의 감탄은 건국 초기 고려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자연 지세를 거스르지 않는 풍수의 사고를 바탕으로 도읍을 정하고 중국의 제도를 수용하면서도, 나라와 왕실이 중국의 그것과 대등하다는 신념에 따라 자율적으로 묘실(墓室)을 경영한 것은 고려의 주체적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정치이념으로는 중국의 유교 질서와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불교국가로서의 위상을 가진 특성이 강력히 응축되어 탄생한 중세 도시가 개경이다.



개경 주위에만 300여 곳의 절이 있었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온 개경 사람들이 어우러져 즐기는 축제였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불화 등의 제작과 불경 간행을 통한 눈부신 인쇄ㆍ출판문화의 발전은 이런 환경 속에서 가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개경은 사람들의 땀내 나는 생활의 공간이었다.



시전과 여항소시라 불리는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청자, 벼루와 당대 최고 품질의 먹 등 문방구를 거래했고, 여자들의 머리장식과 화장품 등 패션 상품도 주요한 거래 품목이었다.



시장과 관아 주변에는 권세가들의 주택가가 밀집해 있었다. 오죽 하면 동네 이름에 ‘정승동’이 있었을 정도.



필자들은 이 개경의 거리에서 벌어지던 싸움질, 무인정권기 최충헌ㆍ최충수 형제의 정권쟁탈의 격전, 수도 방비에 필요한 성곽을 축조하느라 동원된 가난한 일반 백성들의 눈물까지 당시 고려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묘사했다.



이 책은 또한 무엇보다 개경이 우리 역사에서 수도로서는 처음으로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로써 고려는 명실상부한 통일왕국으로서 전 국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개경은 고구려 평양성의 전통을 계승했다. 이전 시기의 전통을 계승하고 중국 제도를 변형 수용해 이룬 개경의 특징은 조선의 수도 한양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개경은 벽란도를 드나들던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코리아’란 이름을 세계에 알린 바로 그 수도이다.



그만큼 유연하고 개방적인 상업도시이기도 했다. 필자들은 “고려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일깨우고, 분단 극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종오 joha@hk.co.kr



입력시간 2002/02/0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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