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악·남경천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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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194회 작성일 05-08-0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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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풍수’(일본 조선총독부 1931년 간행)에 따르면 권중화 가 추 천한 계룡산의 신 도읍 공사를 중지시킨 하륜은 태조 이성 계의 명령에 따라 풍수서를 정독하고, 실제 답사를 통해 새 도읍 지로 무악의 남쪽(현 신촌 일대)을 추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권중화 등 서운관 관리들이 무악의 지세가 풍수 적으로 양호하나 너무 협소하다며 반대했는데, 그 내면에는 권중 화가 신도읍지 로 추천한 계룡산 신도안을 반대한 하륜에 대한 앙갚음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하륜은 “무악의 명당이 넓지는 않으나 계림(신라 수도) 이나 평 양(고구려 수도)의 궁궐 터에 비하면 오히려 크다. 또 한 이곳은 나라의 중앙에 있고, 배로 물건을 나를 수 있고, 풍수 서의 산수조취(山水朝聚) 의 형세와도 흡사하다. 이 땅을 두고 다른 땅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태조는 재상 등을 거느리고 직접 무악을 시찰했다. 그 결 과 하륜 이외의 대신들은 무악의 터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거듭 반대했고, 심지어 아예 천도를 반대하는 공론도 높았다.



고심하던 이 태조는 이번에는 남경(한양, 지금의 경복궁)을 직 접 답사 하고, 국도로 적합한지를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풍 수사 윤신달은 “개성이 제일이고, 남경이 그 다음입니다. 그런 데 건방(乾方·서북방) 이 낮고, 명당수(현재 청계천)가 말라 흉 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 태조는 “개성도 부족한 점이 있다. 이 땅을 살펴보 니 형세 가 왕도로 손색이 없으며, 배로 물건을 나를 수 있고, 마을 길도 균등해 사람들이 일하기 편리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기의 뜻을 굳혔다. 그러 자 여러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뜻 에 찬성했고, 결국 남경, 즉 고려 숙종 때 세운 궁궐 터가 새 궁 터로 정해졌다.



박인호 기자/ihpark@n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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