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강단 돌아온 풍수연구가 최창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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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376회 작성일 05-08-04 16:20본문
“지난 11년간 제 자신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도시 속에서 명 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현대화된 풍수이론도 새롭게 세웠고 요.”
지난 92년 ‘지리 답사를 통해 땅의 기와 맥을 찾는 능력을 보충 하겠다’며 서울대 교수에서 물러난 한국풍수연구가 최창조 (崔昌祚·54)씨가 11년 만에 다시 대학 강단으로 돌아간다. 다음달 경남 함양에 문을 여는 대안대학 녹색대학에서 대학원장으로 풍 수 강의를 맡게 된 것이다. 경산대 객원교수로 강의를 잠시 맡 은 적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 이다.
그는 서울대를 떠날 때에 비해 몸무게가 10㎏ 정도 빠졌다고 한 다. 그는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둔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고 했지만 그동안 생활인으로서의 삶은 고단했다.
“서울대에 사표를 낸 다음 우선 봉천동 집을 팔았어요. 영월에 서 흑염소를 키워볼까 해서 서너 달을 직접 지켜보기도 했습니 다. 송이를 캐볼까, 봉천시장에서 좌판을 해볼까 아내와 기웃거 려 보았지만 자신이 없었어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는 책을 쓰는 작업에 들어가 ‘한국의 자 생풍수’ 등 모두 7권의 책을 냈고, 연구 모임 강좌를 통해 경제 적 절박함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교수 자리를 물러난 뒤 가장 큰 즐거움은 자유롭게 산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1주일에 3~4일은 배낭을 짊어지고 산을 찾았고, 산세를 살피며 기(氣)를 감지하는 것이 그의 연구였다. 그는 경기고 재학 시절부터 산이 나 묘를 찾으면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경기고에 입학했는데 동기들 대부분 이 명문가 아들이었어요. 선생님이 친구들에게 ‘네 아버지 장관 되셨더라’고 하는 말이 예사였죠. ‘난 뭔가’라는 생각을 하면 서 수업을 빼먹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가서 낮시간을 보내는 일 이 잦았습니다. 거기에 가면 마음이 편했거든요.”
그가 기인(奇人)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기인은 망 우리 묘지에서 배회하던 그를 불러 이것저것 물은 뒤 풍수책 필 사본을 건네주었다. 풍수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었다. 기인은 1 년반 뒤 홀연히 사라졌지만 최 교수는 서울대 지리학과에 입학 한 뒤에도 풍수의 대표적인 책인 ‘청오경(靑烏經)’과 ‘금낭경 (錦囊經)’ 등을 구해 읽으며 풍수에 빠져들었다.
최 교수가 학계에서 풍수연구가로 인식된 것은 1978년 대한지리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 ‘한국풍수사상의 이해’를 통해서였다. ‘우리 땅은 우리의 눈으로 보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 는 1988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로 자리잡았고 한국 풍수를 체계 적으로 연구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면서 전국에 ‘풍수 붐’을 일 으켰다.
그러나 교수를 맡은 지 4년 만인 1992년 서울대에 사직서를 제출 했다. “당시 상당수가 ‘풍수가 과학이 될 수 있느냐’며 끊임 없이 저를 공격했습니다. 각종 학회에서 절 불렀고, 나중에는 대 학 모임마다 저를 불러 ‘풍수에 대해 답변하라’는 식이었습니 다. 나중에는 너무 지치더군요.”
그는 “서울대를 그만둔 뒤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라’는 말을 제일 싫어하게 됐다”고 말했다. “풍수를 맹렬하게 공격하 던 사람들이 나중에 저에게 은밀히 전화를 걸어 ‘좋은 터를 봐 달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공은 공이고 사는 사 아니냐’ 고 변명하더군요.”
풍수를 연구하는 최 교수에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터를 봐달 라’는 주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대해 그는 “땅을 통 해 돈을 버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라면서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은 화장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 교수에게 2001년은 풍수를 손에서 놓게 한 ‘위기의 해’였 다. “명당으로 유명한 지역을 찾아가 방송 녹화를 했습니다. 녹 화를 마치고 그 지역의 대표 어른에게 ‘정말 이곳이 명당이라 고 보십니까’라고 물었죠. 그분은 ‘자본(資本)이 명당이지. 돈 만 많다면 아들 사는 도시로 나가살지 미쳤다고 여기에서 살겠 나’고 하시더군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최 교수는 ‘도대체 풍수란 뭔가’ ‘현대에서 풍수의 의미는 무 엇인가’라며 자신의 연구를 되돌아보게 됐다. 그는 “여기서 풍 수를 포기한다면 산소 자리나 봐주는 사술적인 풍수만 키워놓고 그만두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풍수의 현대 적 변용에 골몰하게 되었고 ‘도시 속에서 명당을 만들어야 한 다’는 답을 찾았다고 한다. 도시 어디에 자리를 잡든 추억을 만 들어 의미를 새기면 그 곳이 바로 명당이라는 것이다.
최 교수에게 ‘왜 대학으로 돌아가느냐’고 물었다. “서울대를 떠났지 학교를 완전히 떠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녹색대학에 서 함께 일하자고 권해 ‘알았다’고 했습니다. 풍수의 현대적 적용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 도 필요하고요.”
( 글=孫檉美기자 jmson@chosun.com )
지난 92년 ‘지리 답사를 통해 땅의 기와 맥을 찾는 능력을 보충 하겠다’며 서울대 교수에서 물러난 한국풍수연구가 최창조 (崔昌祚·54)씨가 11년 만에 다시 대학 강단으로 돌아간다. 다음달 경남 함양에 문을 여는 대안대학 녹색대학에서 대학원장으로 풍 수 강의를 맡게 된 것이다. 경산대 객원교수로 강의를 잠시 맡 은 적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 이다.
그는 서울대를 떠날 때에 비해 몸무게가 10㎏ 정도 빠졌다고 한 다. 그는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둔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고 했지만 그동안 생활인으로서의 삶은 고단했다.
“서울대에 사표를 낸 다음 우선 봉천동 집을 팔았어요. 영월에 서 흑염소를 키워볼까 해서 서너 달을 직접 지켜보기도 했습니 다. 송이를 캐볼까, 봉천시장에서 좌판을 해볼까 아내와 기웃거 려 보았지만 자신이 없었어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는 책을 쓰는 작업에 들어가 ‘한국의 자 생풍수’ 등 모두 7권의 책을 냈고, 연구 모임 강좌를 통해 경제 적 절박함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교수 자리를 물러난 뒤 가장 큰 즐거움은 자유롭게 산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1주일에 3~4일은 배낭을 짊어지고 산을 찾았고, 산세를 살피며 기(氣)를 감지하는 것이 그의 연구였다. 그는 경기고 재학 시절부터 산이 나 묘를 찾으면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경기고에 입학했는데 동기들 대부분 이 명문가 아들이었어요. 선생님이 친구들에게 ‘네 아버지 장관 되셨더라’고 하는 말이 예사였죠. ‘난 뭔가’라는 생각을 하면 서 수업을 빼먹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가서 낮시간을 보내는 일 이 잦았습니다. 거기에 가면 마음이 편했거든요.”
그가 기인(奇人)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기인은 망 우리 묘지에서 배회하던 그를 불러 이것저것 물은 뒤 풍수책 필 사본을 건네주었다. 풍수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었다. 기인은 1 년반 뒤 홀연히 사라졌지만 최 교수는 서울대 지리학과에 입학 한 뒤에도 풍수의 대표적인 책인 ‘청오경(靑烏經)’과 ‘금낭경 (錦囊經)’ 등을 구해 읽으며 풍수에 빠져들었다.
최 교수가 학계에서 풍수연구가로 인식된 것은 1978년 대한지리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 ‘한국풍수사상의 이해’를 통해서였다. ‘우리 땅은 우리의 눈으로 보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 는 1988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로 자리잡았고 한국 풍수를 체계 적으로 연구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면서 전국에 ‘풍수 붐’을 일 으켰다.
그러나 교수를 맡은 지 4년 만인 1992년 서울대에 사직서를 제출 했다. “당시 상당수가 ‘풍수가 과학이 될 수 있느냐’며 끊임 없이 저를 공격했습니다. 각종 학회에서 절 불렀고, 나중에는 대 학 모임마다 저를 불러 ‘풍수에 대해 답변하라’는 식이었습니 다. 나중에는 너무 지치더군요.”
그는 “서울대를 그만둔 뒤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라’는 말을 제일 싫어하게 됐다”고 말했다. “풍수를 맹렬하게 공격하 던 사람들이 나중에 저에게 은밀히 전화를 걸어 ‘좋은 터를 봐 달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공은 공이고 사는 사 아니냐’ 고 변명하더군요.”
풍수를 연구하는 최 교수에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터를 봐달 라’는 주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대해 그는 “땅을 통 해 돈을 버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라면서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은 화장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 교수에게 2001년은 풍수를 손에서 놓게 한 ‘위기의 해’였 다. “명당으로 유명한 지역을 찾아가 방송 녹화를 했습니다. 녹 화를 마치고 그 지역의 대표 어른에게 ‘정말 이곳이 명당이라 고 보십니까’라고 물었죠. 그분은 ‘자본(資本)이 명당이지. 돈 만 많다면 아들 사는 도시로 나가살지 미쳤다고 여기에서 살겠 나’고 하시더군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최 교수는 ‘도대체 풍수란 뭔가’ ‘현대에서 풍수의 의미는 무 엇인가’라며 자신의 연구를 되돌아보게 됐다. 그는 “여기서 풍 수를 포기한다면 산소 자리나 봐주는 사술적인 풍수만 키워놓고 그만두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풍수의 현대 적 변용에 골몰하게 되었고 ‘도시 속에서 명당을 만들어야 한 다’는 답을 찾았다고 한다. 도시 어디에 자리를 잡든 추억을 만 들어 의미를 새기면 그 곳이 바로 명당이라는 것이다.
최 교수에게 ‘왜 대학으로 돌아가느냐’고 물었다. “서울대를 떠났지 학교를 완전히 떠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녹색대학에 서 함께 일하자고 권해 ‘알았다’고 했습니다. 풍수의 현대적 적용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 도 필요하고요.”
( 글=孫檉美기자 jmso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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