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계의 단비 ‘녹색대학’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641회 작성일 05-08-04 16:39본문
지난 3월 3일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경남 함안군 백전면에 있 는 폐교 상태의 한 중학교에서 비인가(非認可) 대학이 문을 열었 다. ‘녹색대학’이 그것이다.
그저 또 하나의 실험대학, 대안대학이 생겼구나 하고 넘기기에 는 참여하는 분들의 면면이나 사전준비가 간단치 않고, 개설된 과목을 봐도 상당한 가능성을 느끼게 해준다.
▲ 서울대 장회익 교수, 풍수연구가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
이 대학에는 서울대 장회익 교수, 풍수연구가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 허병섭 목사,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우리 학문의 정체성을 고민해온 학자들이라는 공 통점을 갖고 있다. 학부 과정에 녹색문화학, 생태건축학, 풍수풍 류학, 녹색살림학, 생명농업학 등이, 대학원 과정에는 녹색교육 학, 자연의학, 생태건축학 등이 전공으로 개설됐다.
물론 이 대학을 나와 취직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속물적 인 걱정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차피 대학 가서 취 직 공부에 죽자살자 매달려도 취직하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 다. 더욱이 최근 40대의 절망이 보여주듯 취직을 한다한들 10여 년 남짓 바둥거리다가 회사에서 퇴출당할 거라면 아예 대학 때 본인이 가장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힘을 얻 고 있다.
우선 녹색대학의 탄생은 취업준비 고시원 정도로 전락해버린 기 존 대학들의 헤어날 길 없는 위기가 모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위험이 깊어지면 구원의 길도 열린다고 했던가?
‘녹색’대학에 거는 기대는 여기서 비롯된다. 생계의 고민을 끊 고 진정한 삶, 생명에서 출발하는 학문을 일구고 전하는 장이 되 어달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대학(大學)이 본래 의미하는 바, 큰 학문의 본령이다. 그런 점에서 녹색대학의 성공 여부는 한국 대학 전반의 사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재 학 중 공동체 생활을 하며 농사를 손수 짓고 의식주도 스스로 해 결해야 한다는 원칙 또한 ‘죽은 학문의 사회’가 돼버린 기성 대학들에 좋은 자극이다.
동시에 ‘녹색’대학에 거는 기대 또한 적지 않다. 녹색대학이 개설한 전공을 일별하면서 드는 느낌은 ‘그들의 야심이 만만치 않구나’ 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녹색이 단순한 ‘환경’만 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의 서구적 도시문명이 파괴한 모든 곳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을 ‘녹색’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큰 학문’을 꿈꾸는 대학이라면 그 정도의 야심은 가져야 할 것이 다. 무엇보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공간적 환경과 함께 파괴 된 역사적 환경, 즉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현대에 걸맞게 복 원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어 반갑고 고맙다.
이제 막 걸음마를 내딛는 녹색대학에 과한 주문이 될지 모르겠지 만 두 가지는 당부하고 싶다. 첫째는 아마추어리즘을 넘어서 달 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도 않겠지만 혹시라도 동호회 수 준의 고급문화 강좌 수준에 머문다면 어렵사리 태동한 희망의 싹 이 말라버릴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로서도 큰 손실이다. 둘째는 녹색을 강조하다가 반(反)도시문명으로 흐르는 위험은 경 계해달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도시를 버리고 은둔하려 는 자들만을 위한 삶의 길라잡이보다는 한국인 중 90%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대안을 만 들어줬으면 한다. 그래서 녹색대학이 제도권에 속하지 않았다는 의미보다는 살아있는 대안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의 ‘대안’ 대 학으로 성장해주기를 기대한다.
녹색대학에서는 교수를 ‘샘’, 학생을 ‘물’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한국 사회를 살찌우는 샘과 물이 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으리라고 본다.
이제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답할 차례다. 가랑비도 내리지 않는 데 샘에 물이 고일 리 없지 않은가. 분명 그들만의 힘으로 살림 을 꾸려가기 어려울 것이다. 적은 액수라도 각자 주머니를 조금 씩 가볍게 해보자. 십시일반(十匙一飯)이야말로 우리 조상들이 키워놓은 녹색의 정신 아닌가.
녹색대학의 탄생은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 사회에 희망의 메시지 를 전하는 단비같은 소식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논설위원 hwlee@chosun.com)
그저 또 하나의 실험대학, 대안대학이 생겼구나 하고 넘기기에 는 참여하는 분들의 면면이나 사전준비가 간단치 않고, 개설된 과목을 봐도 상당한 가능성을 느끼게 해준다.
▲ 서울대 장회익 교수, 풍수연구가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
이 대학에는 서울대 장회익 교수, 풍수연구가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 허병섭 목사,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우리 학문의 정체성을 고민해온 학자들이라는 공 통점을 갖고 있다. 학부 과정에 녹색문화학, 생태건축학, 풍수풍 류학, 녹색살림학, 생명농업학 등이, 대학원 과정에는 녹색교육 학, 자연의학, 생태건축학 등이 전공으로 개설됐다.
물론 이 대학을 나와 취직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속물적 인 걱정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차피 대학 가서 취 직 공부에 죽자살자 매달려도 취직하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 다. 더욱이 최근 40대의 절망이 보여주듯 취직을 한다한들 10여 년 남짓 바둥거리다가 회사에서 퇴출당할 거라면 아예 대학 때 본인이 가장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힘을 얻 고 있다.
우선 녹색대학의 탄생은 취업준비 고시원 정도로 전락해버린 기 존 대학들의 헤어날 길 없는 위기가 모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위험이 깊어지면 구원의 길도 열린다고 했던가?
‘녹색’대학에 거는 기대는 여기서 비롯된다. 생계의 고민을 끊 고 진정한 삶, 생명에서 출발하는 학문을 일구고 전하는 장이 되 어달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대학(大學)이 본래 의미하는 바, 큰 학문의 본령이다. 그런 점에서 녹색대학의 성공 여부는 한국 대학 전반의 사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재 학 중 공동체 생활을 하며 농사를 손수 짓고 의식주도 스스로 해 결해야 한다는 원칙 또한 ‘죽은 학문의 사회’가 돼버린 기성 대학들에 좋은 자극이다.
동시에 ‘녹색’대학에 거는 기대 또한 적지 않다. 녹색대학이 개설한 전공을 일별하면서 드는 느낌은 ‘그들의 야심이 만만치 않구나’ 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녹색이 단순한 ‘환경’만 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의 서구적 도시문명이 파괴한 모든 곳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을 ‘녹색’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큰 학문’을 꿈꾸는 대학이라면 그 정도의 야심은 가져야 할 것이 다. 무엇보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공간적 환경과 함께 파괴 된 역사적 환경, 즉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현대에 걸맞게 복 원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어 반갑고 고맙다.
이제 막 걸음마를 내딛는 녹색대학에 과한 주문이 될지 모르겠지 만 두 가지는 당부하고 싶다. 첫째는 아마추어리즘을 넘어서 달 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도 않겠지만 혹시라도 동호회 수 준의 고급문화 강좌 수준에 머문다면 어렵사리 태동한 희망의 싹 이 말라버릴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로서도 큰 손실이다. 둘째는 녹색을 강조하다가 반(反)도시문명으로 흐르는 위험은 경 계해달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도시를 버리고 은둔하려 는 자들만을 위한 삶의 길라잡이보다는 한국인 중 90%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대안을 만 들어줬으면 한다. 그래서 녹색대학이 제도권에 속하지 않았다는 의미보다는 살아있는 대안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의 ‘대안’ 대 학으로 성장해주기를 기대한다.
녹색대학에서는 교수를 ‘샘’, 학생을 ‘물’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한국 사회를 살찌우는 샘과 물이 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으리라고 본다.
이제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답할 차례다. 가랑비도 내리지 않는 데 샘에 물이 고일 리 없지 않은가. 분명 그들만의 힘으로 살림 을 꾸려가기 어려울 것이다. 적은 액수라도 각자 주머니를 조금 씩 가볍게 해보자. 십시일반(十匙一飯)이야말로 우리 조상들이 키워놓은 녹색의 정신 아닌가.
녹색대학의 탄생은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 사회에 희망의 메시지 를 전하는 단비같은 소식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논설위원 hwlee@chosun.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