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염 공포와 차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241회 작성일 05-08-06 11:56

본문

음산한 배경음악과 함께 술잔 돌아가는 장면이 지나가고, ‘쿵’ 하는 충격음 속에 “간염은 술잔을 통해서도 전염될 수 있다”는 경고가 흘러나온다. 10여년 전, 많은 사람들로 하여 금 간염 백신을 맞게 해야 한다는 보건당국의 의지와 백신을 더 팔아야 한다는 제약회사의 장삿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제 작된 이와 같은 공익 광고는 전국민을 간염 공포 속으로 몰아넣 었다.

간염이 침이나 공기를 통해 쉽게 전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 인된 이후에도, 광고가 남긴 이미지는 우리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우리들이 갖게 된 이런 과장된 공포 가운데 소리 없이 눈물 흘 리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비(B)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들이다.



간염 환자가 아니기 때문에 군대에는 아무 문제 없이 입대 해야 하지만, 취직에서는 불합리한 취업거부의 장벽 앞에 뼈아 픈 좌절을 겪는 이중적 지위에 놓이게 된 까닭이다.



2000년부터 공무원 임용에서의 제한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남 아 있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기업체 취직의 길은 아직도 멀기 만 하다.



지금도 간사랑동우회 홈페이지(liverkorea.org)를 방문해 보 면, 비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라는 이유만으로 결혼 직전 실연 당하거나, 입사시험에 합격하고도 첫 출근 전에 취소통지가 올 까봐 불안에 떨고 있는 기막힌 사연들을 수없이 접할 수 있 다.



이제는 국민 대부분이 백신을 맞아 감염의 염려는 더욱 줄게 되 었는데도 3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계속 가해지고 있는 차별은 우리 사회의 비과학성을 잘 보여준다.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를 장애인으로 규정하는 우 리나라 장애인복지법에 의하면 비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들은 장애인이 아니다. 바이러스 보유자이기는 하지만 일상생활 또 는 사회생활에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취업 등 생존 을 위한 영역에서 차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장애인이 아니 므로 보호받지는 못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장애인 못지않은 차별 에 희생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미국 장애인법은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장애인 보호의 범 위를 ‘실제로는 장애를 갖고 있지 않지만, 사회에서 장애인처 럼 취급받음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제 장애 인)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다.



이처럼 새로 추가된 장애인 범주에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취업 을 못하고 있는 에이즈 바이러스 보유자나 비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 우리 법에도 최근 일부 수용된 얼굴 화상 입은 사람 등 이 포함된다.



장애인법이 싸워야 할 대상이 ‘장애 그 자체’가 아니라 ‘장 애에 대한 편견’인 이상, 그 보호대상도 ‘현재 장애를 가진 사람’뿐 아니라 모든 ‘편견 때문에 차별받고 있는 사람’으로 도 확장되어야 함을 명백히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의 기준 정립 에서 의학 또는 재활의 관점을 넘어 ‘차별’이라는 새로운 시 각을 도입한 이런 이론을 ‘인권 모델’이라 부른다.



이에 따라 의제 장애인 고용을 거부하거나 해고한 기업들은 그 이유가 질병 또는 장애 때문이 아님을 따로 입증해야 할 책임 을 지며, 이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 거액의 징벌적 손해배상금 을 부담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채용이 확정된 이후에만 신체검사 서류를 제출하므 로 이런 일이 생길 가능성도 거의 없다.



3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이유 없는 차별의 대상이 되어 인권을 유린받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우리들 모두는 알게 모르게 차별 범죄의 공모자가 되고 있다.



헌법과 사회복지·노동 관련 법안들이 ‘차별금지’라는 새로 운 시각에서 재정비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내년 총선에 모두가 목을 맨 지금 같은 시기일수록 노무현 정부 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차별 금지’ 등 중장기적 개혁과 제들이다. 이것까지 놓치는 순간 이 정부의 미래는 없다.



김두식 한동대 교수·변호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