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集中)과 집중(執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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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868회 작성일 05-08-06 14:18본문
2. 집중(集中)이 집중(執中)에 이를 수 없는 이유
집중(集中)과 집중(執中), 이 둘의 차이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 으로 이야기해보자. 가령 같은 공부를 해도 그렇다. 당장 성적 을 올리기 위해서 승진을 위해서 또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 위 해서 그런 목적의식이 앞서 있는 공부를 할 경우, 아무리 공부 를 해도 공부자체에 몰두할 수는 없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눈 이 먼저 가 있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최선은 집중(集中)일 수밖 에 없다.
반면, 공부자체가 좋고 공부가 좋아서 하는 공부라면, 공부가 수단이 아니라 공부가 목적이라면 그때 집중(執中)을 말할 수 있다. 지혜가 나오는 것은 집중(執中)에서 뿐이다. 집중(集中) 에서는 결코 지혜가 밝아지지 않는다.
공부라는 것이 그렇다, 자신이 공부의 세계, 객관의 세계 속으 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 공부를 자신의 주관적 욕심에 맞춘다 면 이미 공부라고 할 수 없다. 공부의 세계로 내가 들어가야 하 는 것이지 내 욕심으로 공부의 세계를 뚜드려 넣을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법칙을 발견하면서 ‘유레카’를 외쳤 던 순간, 그것은 집중(執中)의 순간이었지 집중(集中)의 순간 은 아니다. 부력의 법칙, 법칙 자체에 골몰했던 순간은 집중의 순간이다. 거기에서 법칙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넘어서 객관의 법칙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뉴턴이 사 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법칙자체에 관심이 있었고 다른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과에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이렇게 이야기 해보자. 기도를 하는 종교인들이 많겠지 만, 천당을 가기 위해서 복을 받기 위해서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성인의 말씀에 따르기 위해서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자도 열심히 기도하겠지만 아무리 해도 집중(集中)할 수 있을 뿐 집중(執中)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 의 기도의 중심에는 천당과 복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천당 과 복에 집중(集中)할 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말씀에 집중하 고 기도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면, 잿밥에 욕심이 없다면 그 때는 기도에 집중(執中)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천당 을 간다고 하면, 누가 갈 수 있을까? 천당에 집중한 사람이 갈 수 있을까? 말씀에 집중한 사람이 갈 수 있을까?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집중의 적은 잡념이다. 부처님을 부 를 때도 잡념은 물러나지 않는다. 그 잡념이 어디에서 오는 것 일까? 염불을 하는 마음과 잿밥을 향한 마음의 괴리, 그것이 잡 념을 만들어낼 것이다. 당초 천당과 극락을 향한 기도라면 자 기 욕심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고 그런 바에야 아무리 집중(集中)해도 그 괴리는 메울 길이 없다.
집중(集中)과 집중(執中), 이 둘의 차이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 으로 이야기해보자. 가령 같은 공부를 해도 그렇다. 당장 성적 을 올리기 위해서 승진을 위해서 또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 위 해서 그런 목적의식이 앞서 있는 공부를 할 경우, 아무리 공부 를 해도 공부자체에 몰두할 수는 없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눈 이 먼저 가 있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최선은 집중(集中)일 수밖 에 없다.
반면, 공부자체가 좋고 공부가 좋아서 하는 공부라면, 공부가 수단이 아니라 공부가 목적이라면 그때 집중(執中)을 말할 수 있다. 지혜가 나오는 것은 집중(執中)에서 뿐이다. 집중(集中) 에서는 결코 지혜가 밝아지지 않는다.
공부라는 것이 그렇다, 자신이 공부의 세계, 객관의 세계 속으 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 공부를 자신의 주관적 욕심에 맞춘다 면 이미 공부라고 할 수 없다. 공부의 세계로 내가 들어가야 하 는 것이지 내 욕심으로 공부의 세계를 뚜드려 넣을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법칙을 발견하면서 ‘유레카’를 외쳤 던 순간, 그것은 집중(執中)의 순간이었지 집중(集中)의 순간 은 아니다. 부력의 법칙, 법칙 자체에 골몰했던 순간은 집중의 순간이다. 거기에서 법칙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넘어서 객관의 법칙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뉴턴이 사 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법칙자체에 관심이 있었고 다른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과에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이렇게 이야기 해보자. 기도를 하는 종교인들이 많겠지 만, 천당을 가기 위해서 복을 받기 위해서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성인의 말씀에 따르기 위해서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자도 열심히 기도하겠지만 아무리 해도 집중(集中)할 수 있을 뿐 집중(執中)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 의 기도의 중심에는 천당과 복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천당 과 복에 집중(集中)할 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말씀에 집중하 고 기도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면, 잿밥에 욕심이 없다면 그 때는 기도에 집중(執中)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천당 을 간다고 하면, 누가 갈 수 있을까? 천당에 집중한 사람이 갈 수 있을까? 말씀에 집중한 사람이 갈 수 있을까?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집중의 적은 잡념이다. 부처님을 부 를 때도 잡념은 물러나지 않는다. 그 잡념이 어디에서 오는 것 일까? 염불을 하는 마음과 잿밥을 향한 마음의 괴리, 그것이 잡 념을 만들어낼 것이다. 당초 천당과 극락을 향한 기도라면 자 기 욕심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고 그런 바에야 아무리 집중(集中)해도 그 괴리는 메울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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